63년 전인 1960년 3월 23일 3.15부정선거와 그 후 일어난 마산의거 수습을 위해 이승만정권은 내무부 장관 최인규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 후임으로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홍진기를 앉혔습니다.
최인규는 앞서 위 타래에서 언급한 5.16쿠데타 세력의 자칭 혁명재판소에서 3.15부정선거 지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나 홍진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1963년 석방되어 삼성가 인척 및 중앙일보 창립자로서 흔적을 이어갑니다.
https://blog.naver.com/open-archives/223053548367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195
(최인규, 홍진기 등 재판 과정 다룬 오픈아카이브 포스팅)
#역사토돈 #오늘의역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4.19혁명 #5.16쿠데타 #중앙일보
#역사토돈 #오늘의역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중앙일보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7629653#layer-sns
19세기 말 레오폴트 2세의 개인 사유지였던 콩고에서 벌어진 만행(한 예로 할당된 작업량을 못 채우면 노동자 손목을 자름..)은 당시 제국주의 열강국들도 경악했을 정도고.. 벨기에 정부가 직할 식민지로 바꿨다가 독립한 뒤로도 독립영웅이자 초대 총리인 루뭄바에 대한 모부투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그 시신은 화장시켰으나 한 경찰관이 '전리품'처럼 금니를 빼돌려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 버렸다.. 그 금니는 2016년에에야 해당 경찰관의 딸로부터 압수되었고 작년에야 본국으로 반환되었다고 한다.
욱일기가 휘날리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청군 성채 공격 장면을 담은 일제 프로파간다화를 마스토돈에서 보게 되니 기분이 묘하네..
(링크는 기증받은 미술관 컬렉션을 올리는 계정에 게시된 글입니다)
※ 우사에 대해 추가 설명하자면, 김규식, 조소앙 등 임정 파리위원부 소속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이 1919~1920년 파리에 체류할 당시 긴밀히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프랑스 정보경찰 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됐던 적도 있습니다.
호찌민은 심지어 자신을 감시한 장이란 이름의 프랑스 경찰관을(!) 임정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에게 직접 소개해주기도 했다는군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10369540&sid1=001
(이밖에 1917년에는 신규식, 조성환 등 재중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사회당이란 걸 만들고 조소앙을 대표로 파견해 '만국사회당대회' - 반전 성향 제2인터내셔널 소수파 모임인듯합니다.. 에서 조선 독립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생각보다 일찍부터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사회주의 연관 국제적인 활동이 많았나 봅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81&aid=0002991734&sid1=001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48792&categoryId=46623
김시현 선생이 원래 부인이 따로 있었던 거구나.. 허허; 그나저나 두 분이 처음 만난 게 코민테른의 1922년 모스크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자리에서였다는 얘기가..
(홍범도, 여운형 등이 참여했던 바로 그 행사 맞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이 무렵 그 레닌한테서 권총을 선물로 받고 평생 간직했었죠. KBS가 2020년 말에 공개한 홍범도 장군 관련 영상에 권애라 선생 등의 모습도 보인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파리강화회의 참여 후 열강국에 실망한 김규식은 이때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을 흡혈귀라 비난해 환호를 받기도.. 이후 다시 반공 성향이 됐지만요)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3209662?sid=102
※ 한편 영상 속에 있는 최진동 장군의 경우 중일전쟁 이후 변절해 일제에 협조했다는 의혹도 있고 그 행적에 관한 설왕설래가 있습니다..
KTV의 문화영화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1968년 베트남전쟁 파병 장병 소위 위문공연 당시 최희준 씨의 하숙생 가창 영상..
참 전쟁에 파병된 장병들 대상으로 울려퍼졌다고 생각하니 가사가 더 묘하게 들리네요..
진화의 무대 위에서 더 다양한 유전자를, 더 오랜 시간 동안, 더 높은 강도로 다듬어 온 고양이가 본래의 터줏대감이던 살쾡이를 밀어내고 인간의 곁으로 들어온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밀려난 살쾡이들은 야생에 머무르고 있던 삵에게 다시 흡수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 대가로 삵은 인간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얻었고, 고양이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번성하는 대신 끝없는 그들의 욕망에 휘둘리는 운명을 맞이했다.
- 바다루, "기기묘묘 고양이 한국사", 서해문집, 2021, p55
※ 동북아, 동남아 각국의 혁명가들이 1908년에 일본에서 결성한 아주화친회의 성격에 대해선 아래 링크한 이전 발췌글과 그 타래를 참조 바랍니다.
장타이옌은 자신이 초안한 '아주화친회 규약(The Asiatic Humanitarian Brotherhood)'을 중국어와 영어로 발표하고,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아시아에서 주권을 상실한 민족이 모두 독립하기를 바란다"라는 취지를 선포했다. 규약에 따라 침략주의자를 제외한 모든 아시아인, 즉 민족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가입할 수 있고, 도쿄에 화친회 본부를 두고, 중국, 인도, 조선, 필리핀, 베트남 등지에 분회를 설립하기로 했다. 또한 회장이나 간사 등의 직무를 따로 두지 않고, 회원은 모두 평등하며, 회원들은 매달 정기적으로 한 차례 집회를 갖고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서로 소식을 전하도록 규정했다. 장타이옌은 또한《민보》를 이용해 아주화친회의 취지를 적극 선전했다.
-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 Humanist, 2012, p138.
제헌국회 당시 조봉암은 인민 표기를 주장했으나 이승만의 측근인 윤치영은 공산주의자들이 쓰는 표기라 반발했고 결국 헌법에 국민 표현을 쓰는 걸로 결정되었습니다. 법학자로서 제헌헌법 기초에 중요한 역할을 한 유진오는 후일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단어를 빼앗겼다며 안타깝다는 심경을 회고록에 남겼죠.
(그런데 조봉암은 말할 것 없고 유진오 본인도 김 강사와 T교수 같은 소설을 쓰며 (카프 진영의) '동반자 작가'라 불렸던 사회주의자 출신이라 인민 표기 관철에 역부족인 면이 있었겠죠..)
유진오는 나중에 자신의 외손자에게 논어 계씨편에서 유래한 '불환빈 환불균(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않은 것을 걱정한다)' 글귀를 써주며 이것이 제헌헌법의 기초 정신이라 말했다는데 이 일화를 2010년대 초반 한겨레 대담 지면에서 회고한 그 외손자가 다름아닌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입니다.
사실 정약용이 노비제를 하늘이 정한 제도라며 옹호하는 글이 2010년대 초반 고려대 논술에 출제되어서 수험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적도 있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마냥 환상을 갖고 보면 아마 이른바 실학자들이라 불릴 만한 사람들 대개에게 실망을 갖게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시대적 한계 속에서 이들이 어떤 길을 걷고 어떤 행보를 했는지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봐야겠지요.
(그래서 저는 정조를 개혁군주로만 묘사한 숱한 작품들이나 다산의 형인 정약전을 무슨 공화주의자처럼 묘사한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별로 안 좋아합니다. 자산어보는 개인적으로 현대사에 대한 은유라 생각하긴 하는데.. 현대사를 무리하게 과거사에 이입하려 할 때 생기는 문제들이 있지요.)
1930년대 북만주에서 공산주의자-우파 민족주의자-아나키스트 세 세력의 유혈충돌을 다룬 콘텐츠가 나오면 어떨까 싶었지만 너무 예민한 주제일지도. 김좌진의 죽음이 묘사 안 될 수 없으니..
다산 정약용이 유배간 뒤 전에 벼슬길에 올라 헛된 꿈을 꾸었다며 나 자신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한 글이 수오재기인데, 첫째 형인 정약현이 지은 고향 집 건물 이름이 바로 수오재(지킬 수, 나 오, 집 재)로 거기서 따온 제목이었다.
어려서 그의 성찰적인 이글을 인상적으로 봤는데, 정약현의 사위가 다름아닌 황사영(정조 사후인 1801년 정순왕후가 남인 등 천주교를 탄압한 신유박해 와중에 제천 배론에서 도피생활하면서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기독교 믿는 서구 열강국들이 함대를 끌고와 조선을 치게 해달라는 부탁의 백서를 썼다가 관에 체포된 뒤 처형된 사람, 이를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 하며 천주교 신도들이 추가적으로 국문당하거나 처형, 또는 유배지 조정되는 일이 벌어진다.)이었다는 사실을 알곤 감상이 더 복잡해졌다(...)
찾아보니 정약현은 천주교를 믿지 않아 화를 면했고 현재의 남양주에 있는 마재 고향 집을 지키다가 1821년에 세상을 떠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