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21세기, 현대인의 80퍼센트는 미약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정신질환은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었다. 드디어 사람들은 등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오던 호르몬과 불안과 스트레스의 흔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기실 이건 사회가 그만큼 그러한 의견표명에 익숙해졌다는 하나의 신호였다. 인류는 마치 19세기 프랑스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끝없는 자기불안과 우울에 빠져들고 있었다.

#글러 #조각글_타래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어느 날 사람들은 이상한 내용의 재난안전문자를 한 통 받았다.
'금일18시 천벌주의보 발효, 신의 심판과 징계에 유의하여 평소의 잘못된 행동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민원이 쏟아졌으나 국민재난안전포털에서는 자신들도 아는 바가 없다며 당혹을 표했다. 현재로서는 해킹공격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아직 추적 중이라는 짤막한 입장 발표가 언론을 타고 흘렀다.
큰 혼란은 없었다. 여야는 언제나처럼 올바른 행정적 처리에 대해 물고 뜯었고, 사람들은 시답잖은 장난으로 치부한 채 다시 코앞의 일에 눈을 박았다. 신의 천벌이 내려진다고 해도 먹고 사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영역인지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중적인 의견은 이 문자의 발신자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일 가능성을 묵살하고 테러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문자를 보낸 자들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데? 시계를 바라보는 눈빛에 미약한 불만과 불안이 서렸다.

#조각글_타래 #글러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학교에 심긴 벚나무는 한때 학생들의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자랐다. 딱히 다들 식물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은 아니다. SNS에 올릴 사진 배경으로 딱이라는 다소 속물적인 이유가 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벚꽃잎과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친구들은 까르르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그네들의 사진사 역을 열심히 해내다, 종이 치면 미련 없이 뒤도는 인영의 치맛자락 아래 아스팔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밟히고 짓이겨진 분홍색 잔해.
아무래도 그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싶었던 순간들이었다. 어떠한 당혹을 빌어 탄생하는 아름다운 추억.

이윽고 타임라인에 속속들이 올라오는 수줍은 미소와 화려한 배경의 사진들마다 나는 마음을 찍어주곤 했다.

#조각글_타래 #글러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가끔 세상은 너무 춥고 날 서 있지만 그런 아픈 순간들을 삶의 굴곡으로 볼 수 있게끔 도와주는 이들이 많아서 다행이야 어쩌면 그들은 모두 조소과 전공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날카로움을 열심히 사포질하는 사람들

이렇게 말하자니 어째 옛날 동화에 존재했을 법한 잊혀진 존재 같다 샌드맨이 세상에 흩뿌리는 꿈의 모래를 천에 박아 넣어 세상의 비명을 곱게 갈아 내던 이들

#조각글_타래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내가 치기어린 사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유감스럽게도 내 장르는 어쭙잖은 얼렁뚱땅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차라리 그나마 위트가 섞인 프랑스 영화에 가깝다
낭만의 나라라는 말과 참 거리가 먼 작품들이 탄생하는 곳을 바라보는 삶 하필 배운 언어도 딱 그 정도의 로망

그 틈새에서 기대는 건 그나마 비슷한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나를 닥닥 긁어모은 무언가 그 희미한 감성 저기 말이야 예술영혼이라는 게 따로 있으려나, 사선으로 틀어진 기분에 가장 찬연하게 불타는 그때의 내가 존재했었어

#조각글_타래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화경은 다시금 학교에 대한 제 기억을 상기한다. 한창 호르몬의 존재를 자각하고 있을 청소년들이 한데 모여 우글거리던 교실을. 아직 몸에 솜털이 돋아 있음에도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신파적 감정에 취해 스스로의 성숙을 증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던 그네들의 치뜬 눈과 번들거리던 붉은 입술과 땀에 절은 교복 셔츠를. 애석하게도 그뿐이다. 그녀에게 학교란 인생의 과도기 시절 잠시 몸담았던 장소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상의 미련도 추억도 없다.

#조각글_타래 #글러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마음에 나르시시즘을 조금은 담아둬야 살아갈 수 있다 인생에 필요한 정량의 질투와 분노와 애수와 불안과 함께 오만이라는 시즈닝을 마음 속 찬장에 잘 넣어두고 언제든 꺼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존재만을 상기하고 지나가는 것

#조각글_타래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인생을 회화 그림 그리듯이 다루어야 하는데. 눌러야 할 곳을 알고 강렬하게 부각시킬 곳들을 알고, 시간과 마음을 적절히 분배해서 세상을 다루고. 순간의 치기어린 감정이 식고 나면 열화된 공기만 남아 살갗을 따갑게 그을린다.

#조각글_타래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알지 인생이 넷플릭스 오리지널처럼 번쩍이는 해상도에 적절한 때에 삽입된 혼잣말 내레이션과 시청자에게 편안한 구도로 매 순간 흘러간다면 좋겠지만 그러면 투자자와 조연출 제작진 역할까지 전부 맡아야 한다는 걸

#조각글_타래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엠티..딱히 가고 싶지는 않은데 뭔가 주변에서 이것저것 인생 가는 길에 쥐여주는 기분.. 그래그래 이것도 먹고 저것도 한 번 먹어봐야 쓰지 않겠니 하고 무지개 별 모양 인위적인 소다맛 사탕 손에 들려주고.. 막상 먹다 보면 텁텁해지는 맛이지만 나중에 그 사탕 모양이 너무 예뻐서 기억나는 그런

#조각글_타래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벗이여 우리가 걷는 길은 평행선이라기보다는 접점 하나를 공유할 뿐이외다
이곳은 참 따스한 곳이라.
작은 점 하나에 삶의 희노애락이 공존하는 것은
참 흔치 않은 법

그래 그 조그만 점 하나에 세상의 추함과 뭉개진 사랑과 덜덜 떨며 웃던 미소 선연한 아름다움, 그 모든 게 집약될 수 있었더랬다

창백한 푸른 점
그 속에서 무한히 올려다보는
무수의 점
그 속에 차마 구겨넣을 수 없는
사랑
질투
비탄
격앙

그런 것들.

#조각글_타래 #글러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그 먼 옛날 한 소쩍새가 굴뚝 위에 걸터앉아 울었으리. 빛나는 황금과 어둑한 밤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망령된 시체와 모든 것을 불태우던 인간을 지각의 틈이 어느 날 꿀꺽 삼켜버린 이야기.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지. 하지만 이야기만은 살아남았네. 나무가 속삭이고 새들이 외치니, 신화가 되어.

신화가 되어 다시 생명을 빚고 이따금 트름을 뱉고 입을 우물거리는 대지를 피해, 멀리 저 멀리. 그리하여 이 세계에는 소쩍새가 우는 굴뚝의 지붕의 붉은 벽돌집 속의 단란한 하나의 가정만 남았으랴. 소쩍새가 울었다. 신화는 다시 날개를 펼치고 떠나갔다.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야 안전하겠지.

#조각글_타래 #글러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굳이 후대의 평가가 내려지기 전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상은 서서히 종말을 향해 속력을 높이며 달려가고 있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선명한 진실. 이제 남은 건 이 고장난 시간의 열차가 언제쯤 막다른 길목에 도달해 충돌할지의 문제뿐이었다.

#조각글_타래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아련한 햇살이 지는 어느 날의 오후, 바다 아래 세이렌들은 해초를 자아 면사포를 짓고 도심 한가운데 미아가 되어 떠돌던 심해의 공주는 처음 보는 화려한 산업혁명의 물결에서 눈을 떼지 못했더랬다-라고, 한때 인어들이 뛰놀던 강물의 오수가 속삭였다.

#조각글_타래 #글러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활자를 쩝쩝 먹어치우던 하얀 여우는 잡혀서 공중에 들려 으와앙 울다가 사냥꾼의 딸이 접시에 따라준 잉크를 할짝이고 있었다지. 발칙한 여우네요. 깜찍한 매력이 있었지. 아이가 마친 숙제를 덥석 물어서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고는 하지만. 저런.

괜찮아. 그 애는 덕분에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었지. 많이 써야 여우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또 글을 잘 쓸수록 여우는 양질의 식사를 했으니까. 그건 좋네요. 그렇지. 그래도 그 글들을 여우가 다 먹어치웠을 생각을 하니 조금 아쉽네요.

괜찮아. 그 아이가 여우를 위해 썼던 글은 자신이 얼마나 여우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거든. 활자를 오독오독 씹을 때 휘어지는 눈매가 참 아름다웠다지. 여우는 행복해했고. 사랑은 쉬이 가늠할 수 없다지만 여우는 그것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으니, 원없이 사랑을 누렸지.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지낸대요? 글쎄, 일전에 이사를 가 버렸지 뭐니. 하지만 아직도 함께 지내지 않을까.

#조각글_타래 #글러

Last updated 3 years ago

선인장 · @gentlecactus
5 followers · 33 posts · Server planet.moe

세상의 움찔거리는 불빛과 흐느적대는 웃음을 본다
자그마한 사금파리를 점점이 이어 붙인 미소나 맥없이 축 늘어진 미나리마냥 찌그러진 입매라던가, 모조리 허울임을 알고 그렇기에 우리는 밑바닥까지 헤엄쳐 온 사이

이건 스쿠버다이빙이야 그렇지?
블루홀까지 내려갈 각오를 하는 거야

#조각글_타래 #글러

Last updated 3 years ago